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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제2의 샤라포바 5인

[디스이즈테니스] 가수 이효리의 성공 이후 솔로 여자 가수들이 가장 많이 내세웠던 명함이 있다. 바로 ‘제2의 이효리’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제2의 이효리’는 물론 ‘제1의 누군가’도 제대로 되지 못했다. 테니스도 비슷하다. 2000년대 중반 등장한 ‘러시안 뷰티’ 마리아 샤라포바(은퇴·전 세계 1위)의 성공 이후 ‘제2의 샤라포바’들이 우후죽순 나타났다. 주목받던 그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국과 인연이 깊은 니콜 바이디소바는 제2의 샤라포바로 가장 먼저 주목받았다

니콜 바이디소바(은퇴·전 세계 7위)는 1989년 체코에서 태어났다. 14세였던 2003년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에 데뷔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두각을 나타냈다. 데뷔 1년 만에 투어급 대회에서 2차례 우승하며 세계 랭킹 100위 안에 든 것. 2005년에도 기세는 여전했다. 바이디소바는 2005년 10월 3번째 투어 우승을 신고했는데, 그 대회가 바로 국내 유일의 WTA 투어 대회인 코리아오픈이다. 대회 첫 우승자이자 전년도 우승자가 샤라포바였던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일찌감치 제2의 샤라포바로 눈도장을 찍었던 셈이다. 당시 코리아오픈을 시작으로 일본, 태국 대회까지 3주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05년 당시 바이디소바의 코리아오픈 우승 기사. 톱시드였던 옐레나 얀코비치(은퇴·전 세계 1위)를 제압하며 전 경기 무실세트 우승을 달성했다. 사진=중앙일보 캡쳐

바이디소바의 4대 메이저 대회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2006년 프랑스오픈 4강, 2007년 호주오픈에서도 4강에 올랐다. 메이저 우승이 멀지 않았다는 평가가 수시로 들려왔다. 18살에 이미 세계 랭킹 7위에 오르며 차세대 여왕으로 예열도 끝낸 상태였다. 비슷한 시기 투어에서 활약한 ‘세르비아 듀오’ 아나 이바노비치(은퇴·전 세계 1위), 옐레나 얀코비치(은퇴·전 세계 1위)보다 더 밝은 미래가 놓인 듯했다. 하지만 2008년, 바이디소바는 이상하리만치 침체기에 빠졌다. 참가하는 대회마다 첫판에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 사이 1위를 넘보던 세계 랭킹도 어느새 100위 권 밖으로 밀렸다.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한 바이디소바는 결국 테니스에 흥미를 잃었다며 2010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곧장 결혼을 발표한 바이디소바. 상대는 남자 테니스 선수였던 라덱 스테파넥

은퇴한 바이디소바는 얼마 가지 않아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21살에 결혼을 발표했다. 상대는 11살 많은 남자 테니스 선수 라덱 스테파넥(은퇴·전 세계 8위)이었다. 바이디소바 은퇴의 실질적인 이유가 스테파넥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특히 스테파넥은 마르티나 힝기스(은퇴·전 세계 1위) 등 여자 테니스 선수들과 이미 염문을 뿌렸던 터라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팬들은 그녀의 행복을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바이디소바의 결혼 생활은 그녀의 선수 생활 만큼이나 짧았다. 둘은 2013년에 이혼을 발표했다. 은퇴와 이혼을 경험하고도 24세였던 바이디소바는 이듬해 선수 복귀를 전격 발표했다.

우승 후 무려 10년 만이었던 2015년 코리아오픈에 참가한 바이디소바. 하지만 예선 첫 판에서 떨어지며 본선조차 뛰지 못했다. 사진=연합뉴스 캡쳐

팬들은 바이디소바의 복귀를 응원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실력은 예전 같지 않았고 이렇다 할 성적도 내지 못했다. 바이디소바는 2015년 코리아오픈에 다시 출전을 신청했다. 2005년 우승자 자격으로 본선 직행 와일드카드(초청선수)를 노렸지만, 그녀의 이름은 주최 측에도 이미 잊힌 상태였다. 와일드카드를 받지 못한 바이디소바는 예선부터 뛰었고 이마저도 첫판에서 탈락했다. 국내 언론들의 인터뷰도 모두 거절한 채 쓸쓸하게 한국을 떠났다. 성적이 없었던 만큼 랭킹도 낮았고 결국 투어를 뛸 수 없었던 바이디소바는 등급이 낮은 서키트와 챌린저를 주로 전전했다. 이후 2016년에 다시 은퇴를 선언했다. 2번의 은퇴 뒤에는 2번째 결혼이 있었다. 스테파넥과 재결합한 바이디소바는 현재 두 딸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세계 12위까지 올랐던 타티아나 골로방(프랑스·은퇴)

타티아나 골로방은 1988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생후 8개월 때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골로방은 14살이던 2002년 투어 무대에 데뷔했고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건 투어 3년차였던 2004년이다. 2004년 초반 랭킹이 354위에 불과했던 골로방은 유망주 자격으로 호주오픈 와일드카드를 받았다. 시드를 받은 선수들을 연달아 격파하며 생애 두 번째 메이저 대회에서 16강에 올랐다. 그해 윔블던에서 또 다시 16강에 오르며 호주오픈 16강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듬해 비너스 윌리엄스, 나디아 페트로바(은퇴·전 세계 3위) 등 톱랭커들을 제압하며 가능성도 입증했다. 골로방 역시 바이디소바가 우승했던 2005년 코리아오픈에 참가했는데, 당시 ‘샤라포바를 이을 재목’ ‘샤라포바보다 예쁘다는 평을 듣는 선수’ 등 언론 플레이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골로방의 전성기는 2007년이다. 비너스, 페트로바, 이바노비치 등 걸출한 선수들을 제압하며 2급 대회(현 WTA500)에서 생애 첫 투어 우승을 신고했다. 하반기에도 우승 1회, 준우승 2회 등 상승세를 이어갔다. 특히 준우승한 대회들이 1, 2급 대회였고 두 대회 모두 결승 상대가 당시 최강이었던 쥐스틴 에넹(은퇴·전 세계 1위)이었다. 에넹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2008년 활약을 예고했다.

2007년 놀라운 활약을 보여줬던 타티아나 골로방. 2008년 활약을 예고했지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허리 부상으로 신음하던 골로방은 결국 2008년 20살의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골로방은 해설자, 모델로 활동했다. 그렇게 잊혀져 간 골로방의 이름이 다시 테니스계에 등장한 건 2019년이다. 7년에 불과했던 투어 생활이 본인도 아쉬웠던 걸까. 은퇴 11년 만에 복귀를 깜짝 발표했다. 몸 상태가 좋아졌다며 테니스 선수로서 다시 자신의 경쟁력을 보여주고 싶다는 다부진 각오도 밝혔다. 2019년 10월 대회 2개에 참가했지만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히면서 대회에 다시 참가하지는 못했고 그 와중에 셋째까지 임신하면서 11년 만의 복귀는 유야무야 잠정 은퇴로 귀결됐다.

미국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멜라니 오딘(은퇴·전 세계 31위)

멜라니 오딘은 1991년 생으로 미국에서 태어났다. 투어 데뷔는 2008년이다. 데뷔 1년 만에 랭킹을 70위까지 끌어올리고 나간 2009년 US오픈에서 단어 그대로 사고를 쳤다. 2회전에서 당시 우승후보였던 엘레나 데멘티에바(은퇴·전 세계 3위)를 꺾은 데 이어 3회전에서는 샤라포바까지 제압했다. 오딘은 16강에서 페트로바까지 돌려 세우며 생애 첫 메이저 8강에 진출했다. 곧장 미국은 흥분했다. 윌리엄스 자매 이후로 이렇다 할 자국 여자 테니스 스타가 없었던 데다 제압한 선수들의 면면이 워낙 화려했기 때문이다. ‘미국 신인 오딘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며 대서특필하고 그녀의 생애부터 경력까지 집중 조명했다. 비록 오딘의 돌풍은 8강에서 그쳤지만 그녀가 보여준 특유의 파이팅 넘치는 모습은 차세대 스타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평생의 운을 그 대회에서 다 썼던 걸까. 정말 그게 끝이었다. 데멘티에바, 샤라포바 등을 연달아 꺾었던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투어 활약이 없었다. 2012년 첫 투어 우승을 차지한 것 외에는 그녀의 이름을 듣기도, 보기도 힘들었다. 결국 30세가 되기도 전인 2017년 은퇴를 선언했다. 오딘은 뒤늦게 근육이 손상되면서 여러 질환이 생기는 병인 ‘횡문근융해증’과 ‘빈맥증’을 앓아서 선수 생활이 힘들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제2의 샤라포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 유지니 부샤르

제 2의 샤라포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가 아닐까. 캐나다 출신 1994년생 유지니 부샤르다. 부샤르는 12살부터 테니스 대회를 뛰었는데 떡잎부터 남달랐다. 2012년 윔블던 주니어 단식 우승을 차지하며 성인 무대에 진출하기도 전에 이미 이름을 알렸다. 본격적으로 차세대 샤라포바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건 2014년이다. 당시 부샤르는 유망주였음에도 벌써 ‘지니부대’라는 팬클럽을 몰고 다녔다. 그 기대와 응원에 부응하듯 부샤르는 처음 참가한 호주오픈에서 4강까지 진출했다. 당시 혜성같이 등장한 부샤르, 아시아인으로 첫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리나로 여자 테니스는 다시금 황금기를 맞기도 했다. 그해 부샤르는 프랑스오픈에서도 4강에 올랐다. 특히 당시 4강 상대가 샤라포바로 정해지며 그야말로 빅매치가 성사됐는데, 비록 부샤르는 졌지만 풀세트 접전이라는 녹록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며 ‘차세대 아이콘’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리고 곧장 이어진 윔블던에서 상승세는 폭발했다. 부샤르는 당시 3위 시모나 할렙, 7위 안젤리크 케르버까지 연파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2004년 윔블던 우승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샤라포바의 잔상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2014년 윔블던 준우승을 차지한 부샤르.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에서도 4강에 오르며 전성기를 보냈다

그 덕에 부샤르는 투어 데뷔 2년 만에 세계 랭킹도 5위까지 끌어올렸다. 예쁜 외모에 출중한 기량까지 더해지면서 광고, 화보 촬영으로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당시 마케팅 파워가 샤라포바를 넘어 1위라는 통계까지 나오면서 제2의 샤라포바가 아닌 제1의 부샤르가 되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부샤르도 갑작스레 원인 모를 부진에 빠졌다. 참가하는 대회마다 첫판에 떨어졌고 눈앞에 다가온 듯했던 메이저 우승은커녕 투어 1승도 쉽지 않은 신세로 전락했다. 다른 선수들처럼 부상도 없었다. 코치도 여러 번 바꿨지만 좀처럼 반등하지 못했다. 단기간 빠르게 성공한 탓에 동기부여가 사라졌다는 분석과 함께 이른바 ‘배가 불렀다’는 비아냥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 랭킹은 100위 권까지 떨어졌고 4강, 준우승을 차지했던 메이저 대회에선 예선을 뛰는 굴욕까지 맛봤다. 기량과 성적만 놓고 보면 그저 그런 선수가 됐음에도 화제성만큼은 여전했다.

2017년 부샤르는 샤라포바와 WTA1000 마드리드 3회전에서 다시 만났다. 당시 샤라포바는 약물 복용으로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뒤 막 복귀한 상태였다. 겉보기엔 60위와 258위의 대결에 불과했지만 ‘아이콘 대결’로 결승전 못지않은 주목을 받았다. 오랜만에 받은 관심에 부샤르는 화끈하게 화답했다. ‘샤라포바의 복귀를 반대한다’ ‘선수 대표로 나가서 열심히 싸우겠다’고 다소 거친 포부를 밝혔다. 당시 샤라포바의 복귀를 두고 선수, 팬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는데 이를 의식한 발언을 내놓은 것. 경기는 접전 끝에 부샤르의 승리로 끝났는데 스포트라이트도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어느새 30대에 접어든 부샤르. 랭킹 200~300위권을 오가며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가장 위험하고, 아름답고, 흥미로운 선수라는 평을 들었던 아라반 레자이

여자테니스협회(WTA)는 아라반 레자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가장 위험하고, 아름답고, 흥미로운 선수’. 이는 레자이의 외모와 함께 배경에 기인했다. 1987년 이란에서 태어난 레자이는 어린 시절 프랑스로 이주했다. 투어도 프랑스 선수로 뛰었다. 애초 레자이는 기량보다는 출생과 이슬람 신자라는 종교적 배경이 더 주목 받았다. 보기만 해도 더운 반짝이는 금색 경기복 등 독특한 패션 센스도 한몫했다. 경기력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건 2007년이었다. 그해 투어 대회에서 당시 세계 2위였던 샤라포바를 제압하며 이름을 알렸다.

전성기는 2009년과 2010년이었다. 이 기간 쥐스틴 에넹, 비너스 윌리엄스, 디나라 사피나 등 전·현직 1위 선수들을 잇따라 격파하며 다크호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최고 등급 대회인 WTA1000 대회 포함 투어 우승도 4차례 차지했다. 앞선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레자이 역시 강렬한 인상에 비해 활약은 짧았다. 2019년 이후로는 아예 투어에서 종적을 감췄다. 다만, 레자이의 발목을 잡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다. 다른 선수 아버지들에게 시비를 걸고 싸우는 등 주니어 시절부터 유별났던 아버지는 그녀에게 걸림돌이었다. 레자이는 선수 생활 내내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한다는 의혹도 받았다. 실제로 2011년 호주오픈에서 레자이가 조기 탈락한 뒤 아버지에 맞은 사실이 드러나 레자이와 아버지는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레자이는 ‘비와 눈이 내리는 야외에서 훈련을 받을 때도 많았다’며 사실 선수 생활 내내 힘든 순간이 많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여자 테니스하면 떠오르는 인물, 마리아 샤라포바
여자 테니스의 대명사격인 된 샤라포바. 세계 1위와 커리어 그랜드슬램 달성 등 놀라운 선수 생활을 보냈다

샤라포바도 처음 등장했을 때 들은 수식어가 있다. 바로 ‘제2의 안나 쿠르니코바’다. 쿠르니코바는 샤라포바보다 앞서 90년대 후반 여자 테니스 투어에서 활약한 러시아 출신 테니스 스타다. 다만, 쿠르니코바는 뛰어난 복식 성적과 달리 단식에서는 은퇴하기 전까지 단 한 차례도 우승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샤라포바는 제2의 안나 쿠르니코바보다는 제1의 샤라포바가 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해냈다. 여전히 떡잎 좋은 여자 선수들은 대명사마냥 듣는 제2의 샤라포바 칭호. 선수 기량에 일관성이 대체로 사라졌다는 평을 듣는 WTA. 외모와 기량을 모두 갖춘 차세대 스타라는 의미의 제2의 샤라포바, 그리고 제1의 ooo는 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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